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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글터

    작성일 : 15-12-25 09:01
    강화 위열공(威列公)취려장군(就礪將軍)지석 묘소
     글쓴이 : 난나라
    조회 : 3,088  




















































     

     

     

     

     

     

     

     

    취려장군 영정(影幀) (1172~1234)
    전쟁기념관 봉안





    전승비 (戰勝碑)

    충북제천시 봉양읍 원박리 박달재




    묘소(墓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능골 (울산광역시 문화재 기념물 제 7호)
    시제일 : 음력 10월 10일 정오




    묘소(墓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시제일 : 양력 11월 첫째주 일요일)



    태지 유허비(胎地)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능골




    송능재




    숭의전(崇義殿) 사적 제223호

    고려태조(高麗太組)를 비롯한 3왕 위열공 위패(位牌)가 봉안(奉安)되어 있다

    경기도 연춘군 미산면 아미리

    (춘향제 : 음력 3월 3일 추향제 : 음력 9월 3일)




    강화재(江華齊)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위열공 위패봉안


    八世 위열공(威烈公) 휘(諱) 취려(就礪) 문하시중(門下侍中) (1172~1234) 享年 63세
    어린 시절 송악산에서 운도산인 정사대사의 신기한 가르침과 계시(啓示 사람의 지혜로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일을 신이 가르쳐 알게 함)를 받고 크게 깨달은 소년은, 학문과 무예(武藝)를 더 열심히 익혀 강직하고 청렴한 인품과 자질(資質)을 겸비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휘 김취려( 金就礪)는, 엄격하고 공정하며 신중한 전략가(戰略家)로 장졸(將卒)들의 존경을 받았던, 고려의 명장(名將)이며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영상(領相)을 역임한 위열공(威烈公)이시며,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역임한 부친 부(富)와 모친 청리주씨(靑里朱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늠름한 소년으로 자라 음직(蔭職)으로 기용되어 동궁위(東宮衛)에 배속되었고, 이후 장군 대장군 상장군에 이르는 동안 명장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하여, 고종 때 나라를 구하고 전란(戰亂)을 극복(克復)한 영웅(英雄)이었다.
    1216년(고종 3년)에 거란적(契丹賊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 시라무렌 강 유역에 살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유목 민족) 10만 명이 가족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 영주(永州) 석주(朔州)로 대거 침입 방화와 살인 약탈로 그 행패가 잔인하여 목불인견(目不忍見 참혹하거나 정상이 처참하여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음)이였다. 이때 그는 섭상장군(攝上將軍)으로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로 출정한 전사(戰史)의 일부이다.
    거란군이 진을 치고 있는 개평역(開平驛)에 도착했으나, 거란군의 수효가 너무 많아 우군(右軍)은 서산(西山)의 기슭에서, 중군(中軍)은 들에서 조금 물러나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이때 취려장군이 칼을 뽑아 들고 기마(騎馬)를 채찍질하여 질풍같이 돌진하니, 이를 본 수하 장졸들이 용기를 얻어 결사(決死)적으로 돌격 전세(戰勢)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후퇴하는 거란 군을 계속 추격하자 그때 상장군 노원순(盧元純)이 이렇게 말했다.
    “군량이 처음 3일치만 가지고 왔는데 지금 다 떨어졌소, 그러니 연주성(延州城)에 물러가 뒷날의 기회를 도모하는 것이 좋겠소” 라는 이 제안에, 위열공은 “아군이 여러 번 승전하여 투지(鬪志)와 사기(士氣)가 왕성(旺盛)하오, 이 기세를 타서 한번 싸워 본 뒤에 논의합시다. 제의했고, 위열공이 앞장서서 적군의 포위를 돌파한 전투에서 세 번이나 승리하고, 2400명이나 사살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이 전투에서 김취려장군의 아들 차자 단병(丹兵)이 전사(戰死)하였다.
    전투의 승리에서 오는 기쁨과 아들을 잃은 비통(悲痛)함을 감내(堪耐)하며, 장군은 치중(輜重육군이 운반하던 온갖 군수품)부대를 보위(保衛)하면서 천천히 행군하여, 사현포(沙現浦)에 이르렀을 때에 강력한 적군의 매복 기습을 당했다.
    김취려장군은 급보(急報)로 원군(援軍)을 요청하였으나 자기들의 안전만을 생각하고 원군(援軍)은 오지 않았다. 홀로 장군은 고군분투(孤軍奮鬪 외로운 군사력으로 적과 용감하게 싸움)끝에 절묘한 지략(智略)과 전술(戰術)로 아군의 피해 없이 적을 격파(擊破)하고, 끝내 치중(수송)부대를 보호하여 박주에 도착하였다.
    원수(元帥)인 노원순이 서문 밖까지 영접 나와서 위로와 축하하기를 “아들의 전사슬픔을 위로하고 갑자기 강적의 복병을 만났는데도 자그마한 손실도 없게 적을 물리치고 3군의 군수품을 온전히 운반한 일은 장군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오”라고 경의를 표하고 마상에서 술을 부어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양군 장병들과 여러 고을의 부노(父老)들이 모두 절하며 말하기를 “적의 강점지에서 맞아 싸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개평, 묵장, 향산, 원림의 여러 전투에서 후군(後軍)이 매 번 선봉으로 싸웠으며, 소수의 병력으로 매 번 대군을 격파하여, 우리 같은 노약(老弱)의 생명과 재산을 보존하게 하여주시니, 그 은덕을 생각하면 보답할 길은 없으나 오직 장군님에게 축수(祝壽)를 드릴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1216년 2월 쫓겨 간 거란군은 군사를 재정비 연합하여 강력한 기세로 진격해왔다. 취려장군은 선봉에서 돌진 일당백으로 적장(敵將)의 수급을 수없이 베고 창과 화살이 온몸에 가득 꽂혀 상처가 깊었으나 충성스런 의분의 기세는 변함이 없었으며, 같은 해 5월에 대장군이 된 그는 가발병(加發兵)이라 일컫는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몸으로 황려현(여주)으로 향했다.
    여주의 법천사 남강(南江)에 도착했는데 강은 홍수로 범람 충주성(忠州城)이 큰 홍수에 유실되고 도강(渡江)이 위태로 왔다. 이에 위열공은 먼저 군사들을 승선케 했고, 공은 마지막 배에 승선했으나 배가 큰 돌에 부딪쳐 배 밑이 뚫려 물이 차오르자 군사들은 공포에 사색(死色)이 되었다. 그러나 위열공만은 앉은 자세로 미동(微動)도 하지 않았으며, 이 일을 본 장졸들은 더 신뢰하고 존경하며 충성심을 발휘하여 정예군(精銳軍)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법천사 근처의 전투에서는 그의 계책인 ‘군대를 나눈 협공책’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잇따라 아홉 차례나 계속되는 전투 끝에 군수품 부족과 장졸들의 누적된 과로(過勞)로 후퇴했다.
    1217년 7월 거란장수 질명(質明)이 인솔하는 10만 대군으로 충주를 거쳐 제천(堤川)의 박달산(朴達山)을 침공하여 왔다.
    이때 김취려 장군이 박달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전술전략(戰術戰略)의 일부 내용이다.
    장군은 소년시절 정사대사의 가르침을 생각하여 신중한 작전을 계획 영상(嶺上)을 선점(先占)하고 “용병술(用兵術)은 사람끼리 화목이 우선이나 지리(地理)는 더욱 경시 할 수 없다.
    적이 만일 먼저 고개를 점령하고 아군이 그 아래에 있게 되면 날쌘 원숭이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시고, 장군 신덕위(申德威)와 이극인(李克仁)이 왼쪽을 막게 하고, 최준문(崔俊文)과 주공예(周公裔)로 하여금 오른쪽을 지키게 한 다음 위열공은 가발병(加發兵)과 함께 고개위로 올라갔다. 위열공이 예측(豫測) 했던 대로 거란 군은 요새(要塞 국방상 중요한 지점에 마련해 놓은 군사적 방어 시설)를 쟁취(爭取)하려고, 좌우봉(左右峰)으로 돌진했고 이에 고개 마루에 미리 포진했던 위열공의 군사가 좌우(左右)에서 일시에 지리(地理)를 이용한 절묘한 전략(戰略)으로 협공하여 공격하니, 골짜기마다 수천씩의 시체(屍體)가 혈하(血河)를 이루어 대승(大勝)을 거둔 혁혁(赫赫)한 전승지이다.
    충북 제천시 박달재 전적비충북 제천시 박달령에는 대승한 김취려장군의 전적비가 있어 지나가는 길손은 영상(嶺上)에 앉아 대첩고사 (大捷古事)를 되새기며 숙연해진다.
    제천 쪽으로 패주(敗走)하는 거란군을 추격하면서 벌어진 6번의 전투에서 모두 연전연승(連戰連勝)하니, 거란 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함경도 여진 땅으로 패주 하였다. 박달령에서 일어난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경상도 지방은 전란(戰亂)의 화(禍)를 모두 피하게 되었으나, 김취려 장군은 오랜 전투에서 오는 누적된 과로(過勞)로 마침내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귀환하여 병을 치료하기를 권하는 여러 수장(首將)들의 말에 위열공은 “차라리 변방의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집안에서 편안하기를 바라겠는가?” 듣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충성심과 애국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 할만하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귀환 치료를 명(命)하여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요양 치료하는 사이 취려장군에게 패해 쫓겨 간 거란군이 재정비하여 막강한 병력으로 수십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또 위협해왔다.
    임금은 완쾌가 덜 된 취려장군에게 친히 지휘하는 기(旗)와 도끼(살생 권을 상징함)를 주고, 조충(趙沖)을 원수로 위열공을 병마사(兵馬使)로 명하여, 1218년(고종 5년) 9월 6일 출전을 명했다.
    장단(長湍)을 지나 동주(洞州)로 가다가 동곡(東谷)에서 적을 만나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위열공은 뛰어난 기상천외(奇想天外 보통사람이 쉽게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엉뚱하고 기발한 생각)한 전략전술(戰略戰術)로, 수천의 적을 사살 생포, 적장(賊將) 모극(毛克)․고연(高蓮)․천호(千戶)․아로(阿老)를 사로잡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거두자, 전의를 상실한 거란 군은 강동성(평남 강동)으로 패주(敗走)하고 말았다.
    이 즈음 강동(江東)에 도착한 몽고의 원수(元帥) 합진(哈眞)과 찰자(札刺) 동진국(東眞國)의 장수 완안자연(完顔子淵)등이 아군에게 강동성에 웅거하고 있는 거란족을 함께 토벌하자고 통첩 제의해왔다.
    1219년(고종 6년) 몽고군은(징키즈칸이 유럽전역을 정벌하여 그 세력이 막강하고 흉폭 잔인했기 때문에) 아군을 도와준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모든 장수들이 꺼려 기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취려장군은 조충(趙沖) 장군에게 “나라의 이해가 바로 오늘에 있고 만일 그들의 뜻을 어긴다면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길 것이오, 내 비록 재주가 모자라나 한번 가 만나 보겠소” 말하고, 십장군병을 거느리고 나서니 그의 늠름한 모습을 실제로 보는 듯 하였다.
    몽고의 원수(元帥) 합진(哈眞)은 김취려장군을 대면한 자리에서 “나와 우호를 맺으려면 먼저 몽고 황제에게 절을 한 다음 만노 황제(萬奴皇帝)에게도 절을 하라” 요구 했으며 이 요구에 위열공은 “하늘엔 해가 둘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인데, 어찌 두 황제가 있으리오(天無二日 民無二王 天下安有 二帝耶)” 대답 하고는 몽고 황제에게만 절을 하니, 그의 장수다운 품격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의 풍모(風貌)는 6척(尺)5촌(寸)의 키에 수염이 배꼽 밑까지 내려오는 풍채와 언동(言動)에 압도된 합진은, 위열공의 손을 이끌어 앉히며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고 이어 합진은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그대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그대가 형이요 이후로 나는 아우입니다” 말했다.
    이 자리에서 합진은 “내 일찍이 서역(西域유럽)의 6개국(個國)을 정벌하며 많은 장수와 호걸을 만났으나 형과 같은 호걸은 보지 못했다”했고 다른 적장(賊將)들도, 김취려장군은 고려에서 제일 지략과 무술실력(武術實力)이 뛰어난 장군으로 높이 평가 존숭(尊崇)했다.
    위열공은 합진과 형제 의를 맺었고 따라서 모든 일들은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난공불락(難攻不落공격하기가 어려워 합락되지 아니함. 의 요새)의 강동성을 공격 할 때는 성(城) 아래 해자(垓字)를 파서 적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만전의 준비를 해놓고, 몽고군 합진과 연합하여 공격을 하니 거란족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군졸과 부녀자 5만 여명이 성문을 열고나와 항복했다.
    합진은 적장 1백여 명을 참수한 후 “두 나라가 만세(萬世) 토록 형제(兄弟)가 되어 오늘을 잊지 말자” 청했고, 몽고 합진 장군은 김취려 장군을 존경하고 많이 흠모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몽고의 도움으로 고려는 거란을 평정했고, 국교를 열어 사신(使臣)의 왕래가 빈번했으나, 1225년(고종 12년)에 몽고의 사자(使者) 저고여(著古與)가 후금(後金)사람에게 피살(被殺)되는 사건으로 국교(國交)가 단절되었다.
    몽고의 태종은, 1231년(고종 18년)에 살리타이(薩禮塔)를 총수로 삼아 침공해왔고, 이에 맞서 박서(朴犀)와 김경손(金敬孫)이 용전(勇戰) 했으나, 결국 강화(講和)를 맺게 되었으며, 서경 주현에 달로화적(達魯花赤) 72인을 머물게 했다.
    그 해 6월 20일에 왕도(王都)를 강화(江華)로 천도(遷都)하여 강도(江都)라 일컬었고, 이때가 위렬공께서 서거(逝去) 2년 전 일이고 고려는 그 뒤 39년 간 강화도에서 비운(悲運)을 겪었다.
    위열공은 전란(戰亂)에서 큰 공(功)을 많이 세웠을 뿐만 아니라, 1221년(고종 8년)에는 추밀원사(樞密院使종2품) 병부상서(兵部尙書종1품) 판삼사사(判三司事종1품)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 판호부사(判戶部事종1품)가 되었다.
    1228년(고종 15년)에는 수 태부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守 太傅 中書侍郞平章事 判兵部事정1품)가 되었고, 그 뒤에 문하시중(門下侍中정1품)으로 영상(領相 현 국무총리)에 이르셨다.
    위열공은 1234년(고종 21년) 향년 63세로 운명하시니, 시호(諡號)는 위열(威烈) (强毅信正猛以剛果 有功安民秉德遵業)이다. 고종묘(高宗廟)와 숭의전(崇義殿)에 배향 되었다. 묘비명은 문신인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가 썼다.
    전쟁터에서 많은 공(功)을 세웠으나 부하에게 돌리고 스스로 내세우지 아니하고, 적은 술 한 잔도 사졸들과 나누워 마시니, 강직하고 청렴한 장군으로, 존숭(尊崇)과 흠모(欽慕)의 소리가 드높았던 위열공은 영상(領相)이 되어서는, 늘 안색(顔色)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자애롭게 통솔하고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동궁위에 배속(配屬)됨을 출발점으로 해서 장군(將軍) 대장군(大將軍)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던 위열공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은 그야말로 전란(戰亂)의 시기였다.
    동아시아의 정세를 보면 몽고가 일어나 중국 화북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금나라를 정벌했고, 금의 지배하에 복속(服屬)하고 있던 거란이 반기(反旗)를 들어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웠다.

    경남 울산광역시 언양읍 송대리 위열공 묘소
    (경남 문화재 사적 제85호) 지정 (1987년 5월)그러나 거란 또한 몽고의 공격을 받아 형세(形勢)가 불리해지자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 침법(侵犯)한 상황이었다. 그 후 몽고는 징기스칸이 유럽대륙을 정벌하여 그 세력이 이루말 할 수 없이 막강하고 결국 이와 같은 전란기(戰亂期)에 강직(剛直)하고 충성(忠誠)스러 러우며 청념(淸廉)한 영웅호걸(英雄豪傑)인 위열장군을 태어나게 했다.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지석 발견된 묘소)


    참고문헌 :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忠傚實錄


    들풀 15-12-25 20:19
     
    훌륜한 분이시군요.
    잘 알았습니다.
    만추 15-12-29 14:15
     
    정말 훌륭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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