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순이 언니 ,<<봉순이 언니>>라는 책이 어느 방송국 ‘느낌표’ 라는 프로그램에서 소개되었다. 제목만 보아도 손끝이 칼로 벤 것처럼 아픔이 스쳤다. 서점 앞에서 차마 그냥 가지 못하고 책을 사서 펼쳐보니 봉순이 언니의 불행하고 팔자가 사나운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었다. 책 속에 봉순이 언니라도 행복하길 바랐지만, 절망이 가득한 삶이어서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1960년대 봉순이 언니의 희생은 우리나라가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된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짖이겨진 생활에서도 봉순이 언니는 희망을 잃지 않고 순박한 모습으로 살아줘서 고마웠다. 보아주는 이 없이 밤에 피었다가 아침에 시들어 버리는 박꽃처럼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소리 없이 가버리고 만 나의 봉순이 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언니는 박꽃을 유난히 좋아 했었다. 한여름이 되면 박 넝쿨은 온 울타리를 뒤덮고 연초록 꽃망울를 살느머니 숨겨 두었다가 어느 날 초저녁에 아무도 모르게 하얗게 웃고 피어난다. 언니는 달밤에 보는 박꽃을 더 좋아했었다. 그런 날 밤에는 내 손을 잡고 박꽃보다 더 하얀 웃음을 웃었다. 언니는 무엇이 그리 급해서 우리 곁을 훌쩍 떠났을까? 언니의 널에는 언니가 밤마다 수 놓았던 십장생 횃댓보, 원앙새 베갯잇, 목단꽃 화려한 방석, 다 놓지 못한 책상보 십자수와 힘께 차곡차곡 넣어주었다. 언니가 쓰던 오색 한지가 붙은 육각 비단함, 예쁜 왕골 모집짝,즐겨읽던 <<구운몽>>, <<춘향전>>이 모두 태워지려할 때 나는 오색실로 꿰매진 바가지만 몰래 감추었다. 어느 때인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언니를 나는 졸졸 따라다니다가 언니가 아끼던 물바가지를 반쪽으로 갈라놓았다. 아까워 하던 언니를 아랑곳하지 않고 삼거리에서 먹자치기를 신나게 하고 돌아와 보니 바가지가 고운 색실로 꿰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바가지에는 언니의 고운 색실들을 담아두고 매일 밤 호롱불 아래서 한 올 한 올 수를 놓았다. <비 내리는 고모령> 을 가만 가만 부르던 언니의 노랫소리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언니와 한 방을 쓰던 나는 겨우 초등학교 3학년 이었고 언니는 스무살 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빙느레 웃어주던 봉순이 언니, 그 고운 우리 언니를 누가 데려갔을까. 언니의 백상여가 연분홍 복숭아 꽃잎이 무수히 떨어지던 고개 너머로 사라지고 어머니는 여러 번 기함을 하셨지만 세월이 자꾸 흐르고 어머니의 떨리는 손에는 곱게 치장한 허수아비 봉순이 언니가 만들어 졌다. 객지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는 한 동네 사는 내 동창 형과 언니의 혼백결혼식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 때 어른들 말씀처럼 정말 언니는 저승을 가지 못하고 우리 주위를 맴 돌았을까. 또 다른 봄이 돌아와 마을에 화전놀이가 열리면 내 동창 어머니와 우리 어머니는 언제나 나란히 앉았고 어머니들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복숭아 꽃잎이 떨어 졌다. 설이 돌아오면 사돈으로 음식을 주고받았지만 이미 오래전에 봉순이 언니를 며느리로 인정해주던 내 동창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당시 문상을 가려던 오빠에게 어머니는, “애야, 그 집은 다른 집과 다르다는 것 알제?” 떨리던 어머니의 목소리에 갈퀴보다 더 억센 어머니의 손이 가냘파 보였다. 그 뒤 어머니도 보이지 않는 사위를 털어내시는 듯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제는 언니를 잊고 살지만 해마다 봄이 오면 울타리 밑에 박씨를 정성껏심는다. 봉순이 언니를 애써 잊지 않으려는 마음과, 박꽃이 피면 향기없는 언니의 희디흰 웃음을 만나보고 싶어서이다. 피를 나눈 자매였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제는 모습마저 희미하고 아무런 그리움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더욱 슬프다. 버림받은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잊혀진 사람이라고 했던가. 언니도 여동생도 없는 나는 외로울 때가 많다. 세상살이 어려움을 터놓고 하소연할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자매들이 나란히 오가는 것을 보면 쓸쓸해진다. 그럴 때면 박꽃앞에 서보지만 박꽃은 말이 없다. 다만 여전히 하얀 웃음으로 언니를 보여줄 뿐이다. 수필가 형 효 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