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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각 전 언양김씨 대종회장 |
본인 김성각은 보(譜)책에서 고려명장 위열공 김취려 장군 행군기를 읽고 늘 마음속으로 궁금하였다. 김취려 장군은 고려 고종묘(高宗廟)와 숭의전(崇義殿)에 배양되고 시호는 위열공이시다.
인터넷을 통하여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고려산 동편에 고려 고종 23대왕 홍릉 위치를 알고, 언양김씨 종친 김현수, 김병권 대부와 상의하여 홍릉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우리 일행은 2014년 9월 21일 아침일찍 전철과 버스로 강화터미널에 도착하여 강화군 화도면에 거주하는 김원식 종친과 합류하여 원식 종친의 자가용으로 고려산 홍릉 종묘(宗廟)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홍릉 종묘(宗廟) 외부는 촬영을 할 수 있으나, 내부는 사전 연락을 취하지 못하여 위패를 보지도 못하고 촬영을 못하여 아쉬움을 뒤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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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홍능 |
고종왕릉 홍릉(사적 제 224호)은 오랜 풍우속에 앞에 개축된 석축은 무너저 보수를 새로하고 왕능은 봉분만 잔듸가 있었고 담장도 울타리도 없이 키 1m 남짖한 문인석 4개와 비석 2개만 서있을 뿐이다.
홍릉을 뒤로하고 계곡을 내려오며 당시 국난을 떠올렸다. 고려 고종은 재위 46년 중 28년은 몽고에 맞서 항쟁했다. 특히 고려고종 때 누란(累卵)의 위기에 앞장선 김취려 장군의 3대대첩(三大大捷)을 생각하며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진강산에 위치한 김취려 장군 묘 참배하려고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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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취려 장군 |
김취려 장군의 3대대첩(三大大捷)은 첫째, 개평역 전투이다.
고려고종 3년 가을(서기1216년) 김취려는 후군병마사로 개평역에서 검을 뽑아들고 말을 채찍질하며 장군 기존정(奇存靖)과 함께 곧바로 적의 포위망을 쳐부스고 그 속을 힘껏 공격하니 적이 패주하였다.
사병들이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진격하니 일당백의 기세였다. 장군은 다음날 문비(文備)와 함께 적진을 가로 끊고치니 가는 곳마다 적과 세 번 싸워 세 번 다 격파하였으나, 공의 큰 아들 단병이 전사하였다.
거란병을 계속 추격하여 남강에 도착하니 부녀들과 어린 아이들을 길가에 버리고 갔으므로 그들의 울음소리가 만 마리 소가 우는 것 같았다 한다.
고려고종 4년 2월 태조탄 전투에서 창과 화살이 몸에 가득 꽂혀 상처가 컸지만 충성스런 의분의 기세가 말과 낯빛에 나타나니 듣는이들이 모두가 장하게 여겼다.
이때 적이 동구(東州:철원)를 합락하였으므로, 최충헌이 왕에게 고하기를 “전군 병마사에 김취려(金就礪)를 임명하시기 바랍니다.”라 직언하여 왕이 그대로 시행하였다.
적을 추격하여 풍양현(豊壤縣: 남양주 진접음 내각리) 효성(曉星)진접 고개까지 침입하였는데 좌군이 먼저 싸우다가 패전 하였다. 그러나 중군과 후군이 산 뒤로부터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적은 다시 남침을 계속했으나, 전군과 후군은 지평현(砥平縣)에서 적을 격파하고 말 1천 필을 노획했다.
5월에 수도에 사는 노예는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군대로 선발하여 전선 (戰線:충주 제천)으로 파송하였다.
김취려(金就礪)는 전군(前軍)을 거느리고 충주(忠州)로 가게 되었다. 김취려(金就礪)는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에도 병을 무릅쓰고 명령을 받들었다.
7월에 황려현(黃麗縣:경기여주) 원성군(原城郡:원주시) 법천사(法泉寺)원주시 부른면 법천리 남천(南川) 가까이 도착했다. 5군(五軍)이 다투어 배에 오르거늘 충주성(忠州城)이 홍수로 파괴되어 김취려(金就礪)가 탄 배에 큰 돌에 부딪쳐 물이 솟구치거늘 함께탄 399명의 사람들은 낯빛이 잿빛이 되나 김취려(金就礪)는 굳게 앉아 옮기지 아니하며 신색(神色)이 자약(自若) 하였다.
얼마 뒤에 세 사람이 뗏목을 타고 흐름을 횡단하여 와서 끊어진 밧줄을 이어 세 사람에게 던져 끌어 당겨서 언덕에 오를 수 있었다. 그들에게 물어보니 이들은 원주에 사는 종들이었다. 그중 건강한 장정은 행군을 함께하였다.
적이 다시 원주를 공격하였다. 주군(州郡)과 백성들이 일치단결 하여 9차레나 적과 싸웠으나, 식량이 부족하고 외부로부터 아무런 구원도 받지못하였기 때문에 고군분투 하였으나 드디어 성(城)이 함락되고 말았다. 거란 군은 본군과 합세하여 충주를 침공하고 십만 대군을 몰아 제천으로 침입하려 하였다.
둘째, 박달영 전투이다. 상장군 최원세(崔元世) 중군(中軍), 김취려(金就礪)는 고려고종 4년(1217년) 5월에 전군(前軍)을 거느리고 맥곡(麥谷) 보리실(忠州西)에서 최원세와 협공하여 3백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노약한 남녀를 잡아 충주로 압송하고 마소와 노획 전리품을 가지고 박달현에 이르렀다.
최공(崔公)이 말하기를“고개 위는 대군(大軍)이 머물 곳이 아니다. 산 아래로 물러나 진을 치자고 했으나”, 김취려(金就礪)가 말하기를 “용병술(用兵術)은 비록 사람끼리의 화목은 우선하나 지형의 잇점은 더욱 중시해야 한다.”7월 김취려 장군은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탁월한 전략과 뛰어난 용병술로 신덕위(申德威), 이극인(李克仁)을 시켜 왼쪽을 막게 하고 최준문(崔俊文), 주공예(周公裔)를 오른쪽을 막게 한 다음 자신은 중군병을 고갯마루에 진을 쳤다.
과연 적장 질명(質明)은 박달령 남쪽에 집결하고 동틀 무렵에 요식처를 쟁취하려고 박달령의 좌우 봉으로 올라왔다. 고갯마루에 미리 포진하고 사기가 충천한 우리 좌 우군이 김취려가 북을 울리면서 지휘하는 대로 함성을 외치면서 앞을 다투어 모두 결사적으로 돌격하니, 박달령 전투의 승리로 경상도 지방은 난을 피하게 되었다.
셋째, 강동성, 평남전투이다.
고려고종 6년(1219년 2월) 몽고장수 합진은 강동성에 웅거하고 있는 거란적을 함께 토벌 하자고 통첩을 보내왔다. 공은 인품이 출중 하셨고 사리 판단이 냉철하고 명석하며 풍채가 당당하여 신장이 6척 5촌의 키에 하얀 수염이 배곱밑까지 휘날리는 공을 합진은 손을 잡고 한자리에 앉히니 그의 언동에 압도되면서 공을 형제국으로 연합하여 거란적을 동년 2월 14일 격파하니 천년에 한번 있을만한 경사이다. 이후 몽고와 내왕이 있었다.
고려 고종 12년 몽고의 사자 저고여(著古与)가 후금(後金) 사람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몽고에서는 자기네 사신을 고려에서 죽였다고 고종18년에 몽고 태종은 사례탑(殺禮塔)을 총수로 하여 밀고 들어왔다.
박서(朴犀)와 김경손(金慶孫)이 응전하였으나 부득이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었고 서경(평양) 주변에 달로화적(達魯花赤) 72인을 머물게 하였다.
동왕 12년 6월 20일에 왕도를 강화도로 천도하고 강도(江都)라 일컬었다.
공은 이시기를 전후하여 10년간 재상(宰相)으로 있었다. 그후 고려는 39년간 강화도 천도의 비운을 격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