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유인 즉슨,
품절되어 귀한 책을 저렴하게 내어 주어 고맙다,
밑줄까지 그어가며 열심히 읽은 걸 보고 어떤 분인지 궁금했다,
망설이다 염치불구하고 전화를 드린다, 오호라, 진주분이시라니 감회가 새롭다.
고향은 아니지만 소시 적에 진주고등학교를 다녔다,
늙고 병들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보니 지난 생이 참 한심하더라,
그래서 잡은 것이 ‘불경’관련 책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늦은 감이 있어 후회스럽다, 관련 책 좀 권해 달라.
에고 늙은이가 주책맞다 했다.
이에 나는,
밑줄은 차마 어쩌지 못한 제 감정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불쾌하셨다면 송구하다,
그래도 찜찜해 하지 마시고 발톱을 바짝 세우고 부디 소망한 것을 캐내시길 바란다,
괜찮으시다면 법륜스님의 ‘금강경’과 티벳 ‘사자의 서’를 보내드렸으면 한다,
아마도 이 책이 당신에게 또 다른 세상으로 안내해 드릴 것이다,
책도 인연이다, 저는 이제 그 책들과 인연이 다해 내어 놓는 것이니
고마워하시지 않아도 된다 했다
그러고 전화를 끊으려 하자 대뜸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물었다.
어떤 일? 어떤 일이라. 그러게나, 나는 대체 어떤 일을 하고 있는 중일까
나..난초를 배우고 있습니다 버벅대며 말했다.
그랬더니 그 분은 잠시 말을 잃더니,
세상에는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 흔치 않게 일어나는 것 같다, 일단 반갑다,
나도 난초라면 좀 안다며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흘렸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러면서, 생뚱맞게도 <잉어 이야기>를 꺼냈다.
잉어는 영악한 놈이지요, 과연 사람과 오랜 세월을 묵은 놈답지요,
혹시 그 놈 낯짝을 본 적이 있나요. 눈이라도 한 번 마주쳐 본 적이 있나요.
하하. 잉어는 다른 놈들과 달리 왠만해선 미끼를 덥석 물지 않아요.
행여나 놈을 만만히 보고 루어 채비라도 했다가는 분명 낭패를 보게 되지요
하여, 놈의 떡밥은 공을 많이 들여야 한답니다. 전날 삶아 으깨 얼려놓은 감자를
고리가 여럿 달린 바늘에 정성들여 매달아야 하지요.
그도그럴 것이 이 공들인 감자들이 물살에 쓸리고 뜯겨
그 날선 고리라도 놈이 보게된다면
그야말로 쪽 팔리는 일 아니겠어요?
그래서 꾼들은 최대한 물살이 잠자는 곳에다 전날 미리 보리밥을 해다가
밑밥을 쳐 놓는 꼼수를 부리기도 한답니다.
그 다음부턴 시간은 우리 편이지요.
흘러가는 물살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낚시대 주변이 미세하게 일렁이기 시작하지요.
그래요, 놈이 관심을 보였다는 얘기지요.
눈썰미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수면 밑에서 노려보고 있는
그 놈의 묵직한 눈빛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치만 이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무심해집니다.
그러기를 여러 번. 어느 순간 낚시 줄이 툭툭 끊어지는 듯한 시점이 옵니다.
아니, 아닙니다. 여기서 자칫 흥분해서 낚싯대를 들어올렸다간
놈의 코웃음 치는 소리만 듣게 되지요.
그래요, 이건 놈이 꼬리로 한번 툭하고 사람 간을 보는 게지요.
그게 아니면 첩자 짓을 하는 피라미들이거나.
여하튼 그렇게 또 시간은 당겨진 고무줄처럼 팽팽히 흘러갑니다.
무심한 하늘, 주름진 강물, 비릿한 바람, 자잘한 소음 그리고 <감자>.
중요한 것은 이 대목에서 그 무엇하나 변.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적어도 그 놈이 눈치를 채게 해서는 곤란하단 말이지요. 말씀드렸다시피 그 놈은
아주 영악하거든요.
변하지 않은 것처럼? 그것 참 어렵군요.
분명 그 놈도 느낄 겁니다. 감자라는 변화. 하지만,
처음부터 그 곳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는 게 미끼라는 걸 놈은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주변의 것들은 모두 그대로 여야 한다?
네. 판은 그렇게 짜는 겁니다.
세상은 판을 짜는 자와 그 판에 놓이는 자, 그리고 그 판을 뒤엎는 자들의 놀이터지요.
여기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지는 각자의 몫이 되겠지요.
<난계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얼어붙은 강물만을 보지 말아요.
그 얼음 아래 깊숙한 곳에서 나는 은밀하고도 거친 소리를 들어요.
그리곤 <무엇이 변해가고 있는 지> 느껴보는 겁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그는 마치 숨이 끊어질 듯 길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내가 책을 받자마자 무작정 당신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오래 전에 알았던 사람처럼 정겹고 반가웠다고,
기회가 되면 꼭 그 잉어 놈의 낯짝을 한 번 봐 줬으면 한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오랜 통화로 뜨겁게 달아오른 폰에 차마 귓볼을 때지 못한 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리곤 그가 그랬던 것처럼
길고도 긴 숨을
오래오래
내 쉬었다.
판을 짜는 자, 다음 판의 수數도 아우를지니
판에 놓인 자, 딛는 걸음마다 신을 자각할지니
판을 엎는 자, 자신조차 모르게 행할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