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규 나주 시장님 김선용 나주시 의장님 고동환 김천일부대 대대장님 과 나주 시청 관련 담장자님 종친님들 께서 먼길 마다 아니하시고
한달음에 달려 오신 서울 부산 대구 울산 대전 멀리 제주도에서 까지 많은 내외빈께서 참석 하여 성대한
출판 기념을 잘 마무리하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다른 행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서 오신 성균관유도회 광주광역시본부 김중채 회장님, 성균관 원임 부관장님으로 정상윤님 박태근님 정남호님 장원석 현 부관장님, 김형관 광주향교 전 모성회장님, 동양문헌학회 김장수 부회장님, 이 외 광주 · 전남에서 오신 우리 유림 선후배님들께서 많이 오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언양김씨 김강락 장학회 이사장님과 김연식 대종회 명예회장님을 비롯 여러 고문님들과 각 지역 종친회장님들 원거리에서 오시느라 고생들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행사를 나주에서 하게 됨은 김천일 선생께서 나주출신이며 나라에서 사액을 내려 국가에서 관리하는 정렬사가 있고, 나주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나주에서 본 행사를 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문열공 건재 김천일 선생은, 외조모 상을 당하여 시묘(侍墓)살이 하는 동안 한병(寒病)을 얻은 몸으로, 호남에선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임난에 활동하셨습니다.
그럼 지금 이 자리에 앉아계신 모든 분들은, 지금으로부터 425년 전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그 의병들에 뜨거운 애국충절의 모습을 재조명하는 광경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1593년 6월 29일 장수들과 백성들이 함께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진주성 함락이 되자 문열공 건재 선생의 아들 상건과 양산숙 경상병사 최경회, 복수장 고종후, 이와 같은 장수들이 남강에 순절 하셨습니다. 그 당시 중과부족이지만 죽음으로써 사수했기 때문에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키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절한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옛 어르신들의 여유로움과 애국충절의 모습을 나타낸 당시 최경회 장수의 시 한수를 인용해보면
촉석루 누각 위해 올라 있는 세 장사
한잔 술에 웃으면서 장강 물을 가리키네
장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저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우리의 넋도 죽지 않으리...
이렇게 죽음을 앞에 두고 여유로운 시를 읊으면서 술자리를 하고 임금님이 계신 북쪽을 향해 우리의 옛 어르신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를 갖추어 순절한 장면을 상상해 볼 때 정말 가슴 뭉클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이 태어난지 이틀만에 어머니를 잃고 6개월만에 또 아버지 마저 잃게되니 부모님 모습을 상상이나 되겠습니까?
이렇게 불우한 생으로 태어난 선생은 늦게 학습을 하는 동안 스스로 깨우쳐, 정읍에 계신 일재 이항 선생을 혼자 찾아가 마침내 수제자가 되어 벼슬길에 오른 김천일 선생의 삶에 조선왕조실록에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의 흔적들이 무려 120여 차례나 게재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조선시대 역사 속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태어나실 때 불우한 삶이였는데, 또 돌아가신 후에도 父子가 함께 순절(殉節)하시게 되어 그 직계후손(直系後孫)이 끊겨지자 이러한 역사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료들이 산재(散在)되어 점점 사라져가 역사에서 멀어져갈 즈음에 이번 나주시와 우리 언양김씨 종친님들의 정성을 모아 발간을 하게 되어 오늘 이 뜻 깊은 자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전집에서 볼 수 있는 선생의 삶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단순한 의병장으로서만이 아니라, 선생의 인품과 학문 · 공직수행 · 의병활동 · 애국충절 이 다섯가지 측면으로 요약할 수 있는 데, 생활하시면서 지인(知人)들과의 오고간 서신과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소 실천 속에서 진리를 터득해 나아가는 일재 이항 선생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본 받아 실천하신분이라는 것이 생활 하나 하나에 다 나타나 있습니다.
이와같은 선생의 사료(史料)를 역사적(歷史的)인 기록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불우하게 태어나 불우한 생활여건 속에서 스스로 삶을 터득하여 학문연구에 힘써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셨다는 사례를 들어 오늘날 자녀교육에 과잉보호(過剩保護)하는 현대인들에게 오늘 드리게 된 문열공 건재 김천일 선생 전집이 책꽂이에 꽂아놓은 장서가 아닌 실제 읽혀서 자녀교육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저의 생각을 말씀 드립니다.” 라는 건제 김천일 선생의 후손이자 언양김씨대종회장의 긍지를 품은 인사말을 했다.
강인규 나주시장
은 축사를 통하여 “나주가 낳은 훌륭한 인물들이 참으로 많으나, 가장 훌륭한 인물로 우리는 건제 김천일 선생을 꼽는 데에 주저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금번의 전집 간행사업은 우리 나주시민들이 간절히 바라고 원하였던 일이었고 또한 우리 나주시민들이 건재 선생을 기리고 선양하는 사업에 있어서 그동안 부족했던 부분을 제대로 채워주시는 소원성취의 큰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앞으로 저를 비롯한 우리 나주시민들은 금번 두 권의 소중한 책자를 정전(正典)으로 삼아 선생을 기리고 선양하는 사업의 교본으로 삼고자합니다.”라며 언양김씨대종회장과 김연식 명예대종회장 · 각 지역 종친 여러분에게 감사와 축하의 인사를 했다.
김선용 나주시의회의장
김연식 전집발간위원장
김선용 나주시의회 의장과 김연식 전집발간추진위원장
은 축사에서 임진왜란 당시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한 김천일 선생의 굳은 결의와 살신성인 실천을 기리는 전집 발간이 뜻 깊음을 장시간 언급하며 공감하는 자리가되었다.
또한 2부 행사에서 김익두 교수는 건재 선생의 후손으로 두권의 전집을 집필소회와 건재 선생의 인품, 학문 및 문학, 공직수행, 의병활동, 애국충절 등 선생의 업적을 설명하였다.
김익두 전북대학교 교수(편집인)
건재
(健齋) 김천일 선생(의병장)은
▶ 1537년(중종 32) 음력 1월 10일 전남 나주 흥룡동 외가에서 출생(아버지 진사 김언침(金彦琛) 강원도 평창/어머니 양성 이씨 나주)
▶ 1537년 음력 1월 12일 돌아가심, 1537년 8월 아버지 돌아가심(외가에서 성장)
▶ 1554년 18세 김효량의 딸과 혼인
▶ 1555년 19세 일재(一齋) 이항(李恒)에게 수학(정읍)
▶ 1573년(선조6년) 37세 때 조정의 천거로 군기시주부 관직시작
▶ 1578년부터 용안현감, 강원도사, 경상도사, 임실현감, 순창군수, 담양부사를 지내고 나주로 돌아와 극념당을 짓고 후진 교육
▶ 1589년 한성부 서윤에 제수
▶ 1589년 이후 56세 수원부사 제임 중 해임(양반층에게 세금과 부역을 균등하게 부과하다 모함으로 탄핵 받아 나주로 귀향)
▶ 1592년(선조25년) 56세 임진왜란 발생
▶ 1592.5.16 송제민 등과 의병 3백 명을 모집 의병을 일으킴
▶ 1592.6.3. 나주 금성관 망화루 앞 의병 출정식(호남지역 의병활동의 주도적 역할, 수원 독산성과 금령전투에서 전과 올림)
▶ 선조 임금, 창의사의 칭호과 장예원 판결사 관직 수여
▶ 선조 임금 의주 피난 중 강화도에 주둔하며 수차 일본군 무찔렀음
▶ 1593년 6월 나주에서 아들 상건과 의병 300명을 거느리고 진주성 입성
일본군이 남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자 제2차 진주성 전투 전 진주성 입성(최경회 · 황진 · 고종후 · 장윤과 성곽 사수 다짐)
▶ 1593년 6월 21일부터 6월 29일까지 9일 동안 일본군 10만 대군과 격렬한 공방전 오후 2시 경 진주성 함락, 김천일 선생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하여 절을 올리고 장남 김상건 등과 순절,
▶1593년 6월 30일 둘째아들 김상곤이 선생을 거두어 나주 내영산 간좌의 언덕에 장사
▶1603년(선조36) 숭정대부 좌찬선에 추증
▶1606년(선조49) 나주 월정봉 아래 선생의 사당 세움, 나라에서 정렬사 사액 내림
▶1607(선조40) 7월 나라에서 문열이란 시호 추증
김천일 선생의 위대한 공로는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곳에 120여 차례 이상 언급, 선생의 정신세계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 이(理)와 기(氣)는 사물을 통해서만 존재하므로 인간은 이런 개념을 오직 사물을 통해서만 인식 · 인지 할 수 있다는 학설을 정립하였다.
선생은 의병장이기 전에 유학자이며 문인이었다. 선생은 문학적 소질이 뛰어나 건재선생문집에서 남긴 시, 상소문, 편지 등 34편의 작품들이 남아 전하고 있다.
김천일 선생의 호국정신 · 구국일념과 문인으로서의 예술적 가치는 현시대 우리들에게 교훈으로 주고 있다.